2020년에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이라는 시대 배경 아래, 세 명의 말단 여직원이 부당한 현실에 맞서 성장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 조직 내 차별, 그리고 평범한 개인의 작지만 용기 있는 행동이 어떻게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경쾌하면서도 진지하게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복고'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본 리뷰에서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다시 보며, 90년대의 정서, 인물들의 성장 서사, 그리고 여성 간의 연대를 중심으로 작품을 깊이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90년대 감성이 살아 숨 쉬는 디테일한 시대 재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 한국의 직장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세밀하게 복원한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5년은 IMF 외환위기 이전의 고도 성장기 후반기로, 대기업 중심의 산업화, 조직 내 위계질서, 그리고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이 일상에 깊이 뿌리내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이 시기의 분위기를 배경음악, 소품, 의상, 대사, 직장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사실적으로 구현합니다. 우선 영화 속 사무실 풍경은 그 시절을 살아온 세대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디테일로 가득합니다. 두꺼운 CRT 모니터, 전화기 옆 노란 메모지, 책상 서랍에 숨긴 도시락통, 그리고 각 부서의 남성 직원들이 앉아 있는 메인 업무 공간과 여성 직원들이 모여 있는 서브 공간의 구조 등은, 단순히 복고적인 분위기를 넘어서 조직 내 위계와 성별에 따른 공간 분리를 시각화한 장치입니다. 의상과 스타일링 역시 영화의 감성을 완성하는 요소입니다. 주인공 이자영(고아성 분)의 정갈한 단발머리와 베이지색 재킷, 심보람(박혜수 분)의 체크 셔츠와 청바지, 정유나(이솜 분)의 블랙 원피스와 볼드한 액세서리는 각 캐릭터의 성격뿐 아니라 당시 유행을 반영하는 세심한 선택입니다. 더불어 PC통신, 삐삐, 노란색 워크맨 등은 시대적 향수를 자극하는 상징적 소품으로 활용되며, 관객이 90년대로의 몰입감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무엇보다 영화는 단지 과거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사회 구조와 정서를 비판적으로 반영합니다. 여성 말단 직원이 ‘자동차 부품’이 뭔지도 몰라도 그저 커피 타는 일이 주 업무였던 당시의 직장 구조, ‘정직원 전환’이라는 사탕발림에 매달릴 수밖에 없던 현실 등은, 현재에도 유효한 문제로 이어지며 씁쓸한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90년대 감성은 단순한 복고를 넘어선, 시대의 그림자까지 담아낸 복합적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성과 용기로 완성된 여성 캐릭터의 성장 서사
이자영, 정유나, 심보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 세 사람은 모두 대졸 사무보조직원, 즉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입니다. 이들은 조직 내에서 말단 중 말단으로 존재하며, 커피 심부름과 복사, 타이핑과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직업적 위치를 한탄하거나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점차 주체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자영은 눈치 빠르고 책임감이 강한 인물로, 회사의 하청 공장에서 발생한 폐수 유출 사건을 처음으로 감지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의문을 넘어서, 그녀는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며 조직의 부패를 직면하게 됩니다. 정유나는 뛰어난 업무 능력을 지닌 인물로, 회사에서 유일하게 ‘정직원이 될 수 있는 실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심보람은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캐릭터로, 숫자와 데이터를 분석하며 진실에 접근하는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이들이 사건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전개가 아니라, 각자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자기 신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세 사람은 각자 사회와 조직으로부터 받은 제약과 상처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줍니다. 이는 단순한 우정이나 동료애를 넘어선 연대의 감정을 형성하며, 영화의 핵심 주제인 ‘함께 목소리를 낼 때 변화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이자영이 상사에게 용기 있게 "저는 이 회사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 믿음이 회사 자체가 아니라 ‘정의롭고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인상을 남깁니다. 영화는 이렇게 개인의 변화가 어떻게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성장서사라는 틀 안에서 섬세하게 구현합니다. 결국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성 캐릭터들을 도구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현대 여성 관객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성 연대의 힘과 작은 목소리의 변화 가능성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여성들 간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는 단순히 ‘여성끼리 친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된 존재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현실을 바꿔나가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90년대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더욱 극적으로 표현되며, 당시 여성의 위치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영화 속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이중 삼중의 차별을 받습니다.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외모나 성격에 대한 평가, 무시당하는 업무 능력, 승진과 정직원 전환의 불공정함까지. 하지만 이들은 주어진 조건을 탓하기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작은 용기를 모아 큰 행동으로 이어갑니다. 이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며, 내부 고발을 결심하는 과정은 단순한 히로이즘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현실적인 용기의 집합체입니다. 이 연대의 중요한 의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동적이었던 이자영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정유나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회의감을 넘어서 정의를 택하며, 심보람이 자신의 숫자적 재능을 사회적 정의 구현에 사용하는 모습은 여성 개개인이 연대를 통해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연대는 회사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하찮게’ 여겨졌던 세 명의 여성이 그 구조를 흔드는 주체가 되는 변화로 이어집니다. 특히 영화 마지막, 세 여성이 ‘다시 커피를 타러 가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같은 커피 심부름이지만, 더 이상 예전의 수동적 존재가 아닌, 자신을 인정받은 동등한 주체로서의 위치에서 그 행동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여전히 구조는 그대로지만,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연대의 힘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성 연대를 중심으로 한 서사를 통해,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작은 목소리들’이 모일 때, 사회 구조 속에서도 충분히 변화와 정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이는 단지 90년대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도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90년대 한국 직장 문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여성의 성장과 연대, 그리고 소시민의 정의 실현 가능성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복고적인 외피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유쾌하지만 진정성 있는 서사 구조는 오늘날까지도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이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